오늘까지 3일 연휴였다. 연휴동안 친구도 가족도 만나고 미용실도 다녀왔다. 오늘은 오랜만에 강남 교보문고에 다녀왔다. 오늘 바깥은 비가 와서 공기가 무겁고 축축했다. 서점에 들어와서 뽀송뽀송한 책 냄새를 맡고 버석한 종이를 만지니 체감 습도가 낮아지는 것만 같았다.
서점을 거니는 사람들은 모두 무해해 보인다. 그런 분위기가 좋다. 섬세하거나 차분하거나 배움과 탐구에 열정적인 사람들이 선별된 곳. 그래서 나도 괜히 지성인이나 예술가로서의 책임감을 느끼는 곳. 공간이 내 고삐를 잡아 쥐는 듯한…
어릴 때 책을 많이 읽었다. 초등학생 즈음인가 아버지가 쇼파에 앉아 책을 읽으시면 나도 옆에 따라 앉아 같이 책을 읽었다. 어머니는 주기적으로 책배달을 시켜주셨다(비대면 도서관 같은 것이다). 또 역사 만화책에 꽂혀서 학교가 끝나면 학교 도서관에 가서 『맹꽁이 서당』을 엄청 읽었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중학생 때는 『한 권으로 읽는 조선왕조실록』을 n회독하면서 국사덕후가 됐다(한 때 였음).
중학생 때 나는 2년 동안 도서부원이었다. 도서부장도 했다. 매일 학교 끝나고 학교 도서관에서 책 바코드를 찍으며 대여/반납을 해주고, 책을 정리하고, 책을 주문하고, 책을 읽었다. 도서관 이용자가 별로 없어서 사서선생님과 나만 도서관에 있는 경우도 잦았다. 그땐 혼자 적막한 도서관 책꽂이 사이사이를 머물며 특이한 책 탐험을 하는 게 내 취미였다. 한창 집중력이 좋을 때라 책 한 권은 단 몇 시간 만에 완독이 가능했다(지금은 성인 ADHD가 된 것인지 당일 1권1독 불가). 책꽂이에 무심하게 기대어 책을 읽는 일, 도서관 안의 의자들 이곳저곳을 번갈아가며 앉아 책을 읽는 일, 나만의 애착자리를 정해서 그곳에서만 책을 읽는 일… 무슨 책을 어떻게 읽든, 책을 읽는다는 것 자체가 아주 자연스럽고 즐거운 시절이었다. 지금 기억나는 그때 내가 좋아했던 책은 『카네기 인간관계론』, 피천득 『인연』, 김훈 『남한산성』…
그리고 중3이 되고 고등학생이 되어서는 책을 거의 읽지 않았다. 성인이 되고부터 어렸을 때 재미없어 보여 읽기 싫었던 고전소설을 좀 읽었다(『이방인』, 『노인과 바다』, 『동물농장』, 『인간실격』 등). 현대소설은 매년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을 읽는 것으로 만족하고 있고. 그리고 어릴 땐 손도 대지 않았던 시집을 읽기 시작했다(이제는 시집을 사는 것만큼 낭만적인 소비는 없다고 믿음). 근래는 철학에 좀 빠져서 쇼펜하우어, 니체, 소크라테스 책을 좀 읽었다. 정말 취향 안 맞는 경제서적도 깔짝 거렸다. 무슨 책이든지 핸드폰 내려놓고 집중할 수 있다면 조금이라도 내게 영감을 줄 수 있다면 뭐라도 읽는 게 좋겠다는 마음이다.
아 오늘도 시집을 샀다(『시는 나를 끌고 당신에게로 간다』). 살까 말까 한참 고민했는데 넘기는 장마다 적혀 있는 문장들이 다 마음에 들어 어쩔 수 없이 샀다. 책장은 이미 포화상태지만 낭만수치는 결핍 상태다. 타인의 낭만이라도 빌릴 필요가 있다.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면 이름부터 사랑하게 된다. 사랑에 빠지면 빈 종이에 계속 그 사람 이름을 적게 되는 것처럼… 내가 사랑하는 책들도 그렇더라. 제목 때문에 좋아하게 된 책도 있고(『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완전 초반부부터 너무 좋아서 아껴 읽은 책도 있다(『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지금 읽는 책은 후자의 경우다. 거의 10여 년 만에 두 번째로 좋아하는 책을 찾은 것 같다. 좋은 문학과, 좋은 영화와, 아름다운 풍경이 있어서, 결핍으로부터 오는 불안에 시달리지 않는다. 나는 안심하며 내일을 맞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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