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이 안 와서 새로 산 버번위스키를 맛만 보려고 땄는데 병을 놓쳐서 다섯 샷잔은 쏟아버렸다. 흑흑. 물이나 커피나 기타 여하의 액체를 쏟는 것보다 훨씬 마음이 아팠다. 씁쓸한 마음으로 위스키 두 잔을 온더락으로 마셨다. 더 마시고 싶었지만 쏟은 걸 생각하니 휴지가 대신 마신 걸로 쳤다.
그러게 물도 쏟으면 주워 담을 수 없지만 위스키를 쏟아버린 건 똑같이 주워 담을 수 없을뿐더러 손해도 더 막심하다. 아까워서 마음까지 아프다.
아이폰 메모장에 적었다.
위스키를 쏟은 기분
샷잔을 넘어뜨린 게 아니라 바틀을 넘어뜨린
향수를 쏟은 기분
오 드 뚜왈렛도 아니고 오 드 퍼퓸을
살다 보면 실수할 수도 잘못을 저지를 수도 있지만, 그 행동이 어떤 양태이냐, 어떤 가치를 훼손했느냐에 따라 그 손해의 단가가 달라진다. 그동안 ’문제’라는 걸 제대로 깨닫지 못했을 뿐 상당히 자주 지적받았던 내 단점—과도한 자기확신을 바탕으로 한 권위적 화법—이 결국 내 위스키를 쏟았다(버번도 아니고 빈티지 싱글몰트 위스키급인).
내가 그토록 사랑하고 아낀다고 떠들었던 그 사람의 마음을 다치게 했다. 내가 쏟은 양이 몇 샷인지 가늠조차 안 된다. 현침살로 타인들을 그렇게 푹푹 찌르면서 죄책감도 안 느꼈던 지난날들이 이제야 카르마로 찾아오는 것만 같다. 예쁜 크리스탈 잔에 담겨야 마땅한데 바닥에 흩뿌려진 위스키에게 너무 미안해서 잠시 울음을 참다가 사과를 해도 눈물을 흘려도 위스키 바틀은 채워지지 않는다는 걸 상기한다. (역설적으로 더 귀해진) 남은 위스키는 반드시 소중하게 보존하고 가치 있게 음미하겠다고 다짐한다(다짐만으로는 안 돼. 단기적인 노력으로 평생 지닌 화법을 고칠 수 있을까? 근데 고치지 못하면 어떡해, 그땐 위스키 병을 깨뜨리는 것과 같다. 나는 보여줘야 한다. 내가 바뀔 수 있는 인간이라는 걸, 교정이 가능한 인간이라는 걸). 한편 쏟은 만큼 비워진 유리병의 vacancy는 어떻게 채워야 하나 마음이 무거워져. 만회는 어려운 것이다. 잘못을 만회할 때는 평균보다 두 배는 더 노력해야 한다.
상처받은 표정으로 자리를 떠나는 그대의 마지막 모습이 어른거려 도무지 잠에 들 수 없다. 온라인부터 오프라인까지 그대의 흔적을 보고 읽고 만지작거리다가 그대가 사준 코끼리 인형에 코를 박고 킁킁거리다가 그대가 너무 보고 싶어서 팔자 눈썹을 하고 입꼬리를 내리고 글썽거렸다.
에어컨 팬 소리가 풀벌레 우는 소리 같고 공기청정기 작동 소리가 잔잔한 바람 소리 같다. 여러 불안과 슬픔을 또 혼자 잠재워 본다(이 분야에서는 고수여야 한다). 그렇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 어떻게 하는 게 좋을지 도무지 모르겠는 눅눅한 새벽을 보내며 번뇌와 자숙으로 잠을 미룬다. 내일(사실 오늘)은 일요일이라는 좋은 핑계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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